글로벌 제약 산업이 사상 최대의 구조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수십 년간 제약사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온 블록버스터 의약품들의 특허가 2025년부터 2030년 사이 대거 만료되면서, 빅파마들의 M&A 전략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서 있다.
특허 절벽의 규모: 수백 조 원의 매출이 사라진다
아이큐비아(IQVIA) 분석에 따르면 2025년부터 2029년까지 주요 10개국에서 특허 만료로 독점권이 소멸되는 의약품 매출 규모는 약 2,200억 달러(약 300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직전 5년(2020~2024년) 손실액의 3배를 웃도는 수치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의 ‘특허 절벽: 미국 바이오시밀러 시장을 공략하라’ 보고서(2025년 12월)는 2025~2030년 사이 연 매출 10억 달러 이상의 블록버스터 의약품만 약 70개가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영향 받는 매출 규모를 최소 2,000억 달러에서 최대 4,000억 달러로 추산했다.
가장 주목받는 품목은 머크(MSD)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Keytruda)다. 2024년 기준 연 매출이 250억 달러(약 33조 원)를 상회하는 세계 매출 1위 의약품으로, 2028년 미국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다. BMS의 항응고제 엘리퀴스(Eliquis)는 2025~2026년 미국·유럽 특허가 잇따라 만료되고, 노바티스의 심부전 치료제 엔트레스토(Entresto)도 2025년 미국 특허가 만료됐다. 리제네론의 황반변성 치료제 아일리아(Eylea)는 2024년 기준 연 매출 95억 달러(약 13조 원) 규모로, 저용량 제형의 물질 특허는 2024년 6월 미국에서 이미 만료됐다.
빅파마의 대응: R&D에서 M&A로 무게중심 이동
특허 만료 위기는 빅파마들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내부 R&D 투자를 통해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표준이었다면, 지금은 외부에서 검증된 파이프라인과 플랫폼 기술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바이오타임즈의 분석에 따르면 시장조사업체들은 2025년 글로벌 생명과학 분야 M&A 규모가 약 2,400억 달러(약 320조 원)로 전년 대비 81% 증가한 것으로 집계했다. EY 보고서는 2023년 기준 전체 바이오제약 M&A에서 빅파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69%에 달했다고 밝혔는데, 2022년 38%에서 불과 1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른 수치다.
빅파마별 움직임을 보면 전략이 선명하다.
머크(MSD)는 키트루다 의존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항암 파이프라인 확보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2028년 키트루다 특허 만료에 대비해 혈액암을 포함한 다양한 항암 파이프라인을 선제적으로 확보 중이다.
노바티스는 약 120억 달러를 투입해 어비디티(Arrowhead Pharmaceuticals의 분사 기업)를 인수하며 리보핵산 간섭(RNAi) 기반 치료제 영역으로 확장했다.
일라이 릴리(Eli Lilly)는 비만 치료제 마운자로로 글로벌 시장을 석권하는 동시에, 신경과학 분야 파이프라인 확보와 RNA 전달 기술 확보를 위한 M&A에 적극적이다.
로슈(Roche)는 89바이오를 최대 35억 달러(약 5조 원)에 인수하며 MASH(대사이상 관련 지방간염) 치료제 시장에 뛰어들었다. 89바이오의 핵심 파이프라인인 페고자페르민은 염증 억제와 섬유증 개선 효과를 동시에 보이는 FGF21 유사체다.
약사공론의 보도에 따르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인수는 단순히 유망 후보물질을 사들이는 수준이 아니라, 향후 10년 뒤 시장 판도를 좌우할 기술 플랫폼을 선점하려는 경쟁”이라며 “특허 만료를 앞둔 빅파마일수록 공격적인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이 타깃이 된 이유
글로벌 빅파마의 파이프라인 확보 전쟁에서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뚜렷하게 부상하고 있다. 에이비엘바이오, 리가켐바이오, 알테오젠, 올릭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 흐름을 만든 배경에는 두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있다.
첫째, K-바이오의 기술 경쟁력이다. ADC(항체약물접합체), RNA 치료제, 약물전달 플랫폼 등 빅파마가 가장 필요로 하는 영역에서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수준의 기술을 축적해왔다. 단일 파이프라인이 아닌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이 특히 주목받는다.
둘째, 밸류에이션 매력이다. 동일한 기술 수준이라면 미국 나스닥 상장사보다 국내 코스닥 바이오 기업의 기업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빅파마 입장에서는 같은 돈으로 더 많은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다.
2025년의 주요 딜
에이비엘바이오 × GSK·일라이 릴리: 2025년 한 해 동안 에이비엘바이오는 총 8조 원 이상의 기술이전 계약을 성사시켰다. 2025년 4월 GSK와 뇌혈관장벽(BBB) 셔틀 플랫폼 ‘그랩바디-B’를 약 4조 1,000억 원(약 21억 4,000만 파운드) 규모로 기술이전한 데 이어, 11월에는 일라이 릴리와 동일 플랫폼으로 약 3조 8,000억 원(약 26억 200만 달러) 규모의 추가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일라이 릴리는 계약과 별도로 220억 원 규모의 지분 투자(보통주 17만 5,079주)까지 단행했다. 국내 바이오벤처가 글로벌 빅파마로부터 직접 지분 투자를 받은 첫 사례다.
알테오젠: 피하주사 제형(SC) 약물전달 플랫폼 ‘ALT-B4′(재조합 인간 히알루로니다제) 기술을 머크(MSD), 다이이찌산쿄 등 글로벌 제약사에 연이어 기술이전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리가켐바이오: ADC 전문 기업으로, 독자적 링커·페이로드 기술 기반 차세대 ADC 신약을 개발하며 총 14건 이상의 기술이전 계약을 성사시켰다. HER2 타깃 ADC 후보물질 LCB14는 중국 임상 3상이 진행 중이다.
올릭스: 2025년 2월 일라이 릴리에 약 9,000억 원대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발표 후 3주 만에 시가총액이 3배 가까이 뛰어 1조 원을 돌파했다.
에이비엘바이오 이상훈 대표는 2026년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 “최근 JP모건에서 ‘서양(West)과 동양(East)의 만남’이 굉장히 중요해졌다는 것을 현장에서 체감했다”며 “글로벌 빅파마들이 한국 바이오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기술이전과 M&A 인수의 차이: 한국 바이오의 다음 단계
지금까지 국내 바이오 기업과 글로벌 빅파마의 거래는 대부분 기술이전(License-out) 방식이었다. 국내 기업이 기술과 후보물질의 개발·상업화 권리를 넘기고, 계약금(Upfront)과 마일스톤, 로열티를 받는 구조다. 이 구조에서 국내 기업은 기술 개발자이되 최종 상업화의 주체는 빅파마가 된다.
그러나 최근 에이비엘바이오·일라이 릴리 거래처럼 지분 투자가 동반되거나, 플랫폼 전체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 흐름이 이어진다면 향후 완전한 M&A(경영권 인수)로 이어지는 딜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미래에셋 김승민 연구원은 “바이오텍은 막대한 비용과 낮은 성공 확률로 인해 자체 상업화까지 가는 사례가 드물다”며 “주요 블록버스터의 특허 만료를 앞두고 빅파마들의 신약 확보 수요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CDMO: 생산기지로서의 한국
기술이전 외에 또 하나의 큰 흐름이 있다. 한국이 글로벌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생물보안법(BIOSECURE Act)이 2024년 12월 발효되면서 중국 CDMO 기업과의 거래가 제한됐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롯데바이오로직스 등 국내 CDMO 기업들에게 반사이익 기회가 열렸다. 메디팜스투데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특허 절벽과 지정학적 CDMO 재편이 겹치면서 한국 기업이 대규모 바이오의약품 생산 기회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PwC컨설팅 백종문 전무는 서울경제 강연에서 “빅파마의 블록버스터 신약 특허 상당수가 3~5년 안에 만료되며, 제조 경쟁력을 지닌 한국에 바이오라는 큰 시장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의해야 할 리스크
빅파마와의 대형 계약이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025년 2월 에이비엘바이오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노피가 2022년 에이비엘바이오로부터 기술이전받은 파킨슨병 이중항체 후보물질 ‘ABL301′(최대 10억 6,000만 달러 계약)을 파이프라인 우선순위 조정 대상으로 분류하면서, 에이비엘바이오 주가가 하루 만에 약 20% 급락해 시가총액 약 2조 5,677억 원이 증발했다.
기술이전 계약 구조상 빅파마 파트너사의 임상 전략 변경이나 파이프라인 우선순위 조정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계약금(Upfront) 외에 마일스톤과 로열티가 파트너사 판단에 따라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리스크를 항상 안고 있다.
마치며
특허 절벽은 빅파마에게는 위기이고, 한국 바이오에게는 기회다. 에이비엘바이오의 릴리 지분 투자 유치, 삼성바이오에피스의 키트루다 바이오시밀러 임상 진행, 셀트리온의 아일리아 바이오시밀러 미국 허가 및 출시 확정 — 이 모든 뉴스가 같은 맥락에서 나오고 있다.
다만 기술이 좋다고 해서 자동으로 빅파마의 선택을 받는 건 아니다. 임상 데이터로 가치를 증명하고, 빅파마 포트폴리오의 공백을 정확히 겨냥하며, M&A에 대응 가능한 내부 구조를 갖추는 것 — 이 세 가지가 K-바이오가 특허 절벽 수혜를 실제 수익으로 전환하는 핵심 조건이다.
References & Sources
-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 (2025년 12월). 특허 절벽: 미국 바이오시밀러 시장을 공략하라. 헤럴드경제 보도 인용.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643726
- IQVIA 분석. 아이큐비아 데이터 인용 — 2025~2029년 특허 만료 의약품 매출 2,200억 달러 추산. 데일리안 보도. https://www.dailian.co.kr/news/view/1598624
- EY. Firepower Report 2024. 팜뉴스 보도 인용. https://www.pharm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9471 — 빅파마 M&A 비중 69% 통계
- 바이오타임즈. (2026년 4월). 빅파마, R&D에서 M&A로 무게 이동. https://www.bio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85 — 2025년 생명과학 M&A 2,400억 달러 규모
- EBN뉴스센터. (2026년 1월 16일). [JPMHC ’26]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 “빅파마 시선, 이제 한국으로.” https://www.e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5500
- 서울경제. (2025년 11월 14일). 빅파마 손잡은 에이비엘바이오…’신약 성과 공유 본격화’. https://www.sedaily.com/NewsView/2H0GAZ2WUM — 에이비엘바이오·릴리 지분 투자 220억 원 팩트
- 약사공론. (2026년 4월). 포스트 블록버스터 쟁탈전…글로벌 제약사 ‘인수’ 경쟁 격화. https://www.kp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2612 — 머크·노바티스·릴리 M&A 전략
- 메디팜스투데이. (2025년 12월 14일). [팜스 뷰] 美 관세가 때리고 특허가 흔든다…시계제로 2026 제약시장. https://www.pharms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400952
- 데일리팜. (2026년 2월 2일). 빅파마 기술이전과 변수…K-바이오, 파트너 행보 촉각. https://m.dailypharm.com/user/news/335382 — 사노피·에이비엘바이오 파이프라인 조정 사례
- 서울경제. (2025년 7월 31일). 빅파마 특허 3~5년 내 만료…’韓 제조 우위 기회 충분’. https://www.sedaily.com/NewsView/2GWGGPEZ1E — PwC컨설팅 백종문 전무 발언